전주 센트럴에비뉴원 [점선면]“휴먼, 내 소설 빨리 수정해요”…AI가 쓰고 작가는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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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민종 작성일26-02-04 22:06 조회50회 댓글0건본문
“그들은 태양신 히페리온의 소들을 먹는 ‘스불재’, 즉 스스로 불러온 순전한 어리석음 때문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출판사가 펴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번역본 내용입니다. 이 출판사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제미나이로 번역한 세계 고전문학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데요. 사람이 제대로 감수하지 않은 건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요즘 인터넷 은어가 그대로 실려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샀어요.
그런데 이 일, 해프닝으로만 넘기기엔 어딘가 찝찝합니다. 최근 출판계에 AI는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고 있거든요. 얼마 전에는 AI 챗봇 ‘그록’을 운영하는 xAI가 AI 생성 글을 고치기 위해 베스트셀러 작가와 저명한 학자들을 고용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창작’에까지 깊게 스며든 AI,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xAI가 채용하는 직무는 ‘글쓰기 전문가(Writing Specialist)’입니다. 지원 자격은 휴고상 등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른 베스트셀러 작가, 부교수급 학자 등입니다. 그런 세계 최고 수준의 글쓰기 전문가들에게 주어질 업무는 ‘AI가 쓴 글 고치기’입니다. AI가 쓴 시·소설이나 논픽션·저널리즘, 법률·의학, 게임 작문 등을 다듬는 일이죠. 외신은 “작가들에게 이 제안은 기회라기보다 조롱에 가깝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AI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책을 찍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 출판사 루미너리북스는 AI를 이용해 지난해에만 최소 9000권의 전자책을 출판했습니다. ‘에디팅팀’이라는 저자명으로 경제·인문·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뽑아냈죠. 예를 들어 ‘패션 출판 에디팅팀’은 AI 생성 패션 이미지를 활용해 피크닉 스타일링 북, 과제 발표 스타일링 북 등을 따로따로 냈습니다. 루미너리북스는 자사를 향한 비판에 “저희의 장기적 비전은 한국 AI 기술 발전 기여”라며 “AI는 이미 출판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에서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했습니다.
AI 양산 책은 독자들에게 불편을 끼칩니다. 한 연구자는 주간경향에 “학술서가 필요해서 AI 생성 책인지 모르고 몇 권 사봤는데 내용이 엉망진창이었고, 참고문헌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팔리지 않는 학술·교양서적은 도서관 납본 매출이 중요한데, 도서관의 한정된 책 구매 예산을 AI 양산 책이 지나치게 많이 차지하면 다른 출판사들이 손해를 볼 가능성도 큽니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은 루미너리북스 책 300여권의 납본을 거부했습니다.
일단 지금은 문학보다는 비문학 쪽이 AI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학도 AI의 파도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충격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문학은 우리가 ‘인간만의 것’을 꼽을 때면 늘 앞자리를 차지하곤 했으니까요.
지난해 신춘문예나 주요 문학 공모전에서는 ‘생성형 AI를 사용 혹은 활용한 것이 확인될 경우 당선을 취소한다’는 안내 문구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문학 작품을 쓸 때 AI를 활용하는 이들이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죠. 미국의 SF 전문 출판 사이트 클락스월드는 2023년 2월 ‘더 이상 투고를 받지 않겠다’고 공지했습니다. 챗GPT 출시 이후 AI로 만든 작품이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국내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의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도 최근 ‘작가가 AI를 쓴 것 같다’는 독자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향신문은 작가·평론가·교수 21명에게 ‘AI를 활용한 문학’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는데요. 문학인들의 의견은 엇갈렸습니다. 김보영 소설가는 “누군가가 나에게 상과 저작권료를 준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온전한 창작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성태 소설가는 “적어도 내 손끝에서 써지는 것들은 100% 내 몸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깊이 각인돼 있다”며 “학생들에게 ‘나는 마지막 세대가 되더라도 소설에 AI를 활용하지 않겠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판단대로 하라’고 말한다”고 했어요.
반면 노대원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AI 사용 금지는 예술이 기술과 공진화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며 “현대예술은 언제나 기존의 관습과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자 비판이었다”고 했습니다. 장강명 소설가는 “AI를 리서치에 활용한다면 이것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고, AI가 생성한 문장을 사람이 다시 고치면 (지금의) AI 탐지 장치가 그것을 탐지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AI를 작가로, AI 생성물을 창작물로 인정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도 뜨거운 논쟁거리일 겁니다. 논쟁이 어떻게 흘러가든 중요한 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까지 AI에 온전히 떠넘기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해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실험 결과, 챗GPT를 사용해 에세이를 쓴 학생들과 직접 글을 쓴 학생들은 기억·언어·비판적 추론 관련 뇌 활성도에서 큰 차이가 났습니다. 챗GPT 사용 그룹은 4개월 뒤엔 AI의 도움 없이는 글을 쓸 수도 없었죠.
AI로 모든 걸 처리할 수 있는 ‘딸깍 시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퇴화시키지 않으려면 치열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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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한 선생님이 용기를 내 신고를 했습니다. 다행히 피해 정황이 확인됐지만 학교는 선생님에게 전보(다른 학교로 이동)를 통보했습니다. 선생님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서울 한 중학교 교사 지혜복씨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일입니다. 지씨는 투쟁 끝에 지난달 29일 전보 취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서울시교육청도 항소하지 않기로 했고요. 학생들을 지키려 나섰던 교사가 왜 해임까지 당한 걸까요? 오늘 점선면이 정리해보겠습니다.
지혜복씨는 2024년 6월 서울시중부교육지원청을 상대로 낸 전보 무효 확인 소송에서 지난달 29일 승소했습니다. 지씨는 전보가 공익신고에 대한 불이익 처분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재판부는 “지씨의 이 사건 신고가 공익신고에 해당하고, 지씨가 공익신고자에 해당하며, 처분(전보)이 공익신고자 보호법에 반하는 불이익한 처분이라고 판단했다”며 “전보 처분을 취소한다”고 밝혔습니다. 공익신고와 공익신고자 자격을 인정받은 겁니다.
판결 직후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30일 항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이번 판결 취지를 엄중히 받아들여 공익신고자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에 힘을 쏟겠다”며 “지혜복 선생님이 권리와 지위를 회복해 하루빨리 학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긴밀히 협의하고 적극 노력하겠다”고 했고요.
문제의 발단은 서울 시내 한 중학교 남학생들의 성희롱 사건입니다. 당시 해당 학교 상담부장으로 재직하던 지혜복씨는 2023년 5월 여학생 다수가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외모를 평가하는 식의 성희롱과 동의 없이 몸을 만지는 성추행이 오랫동안 지속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지씨는 익명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여학생 31명 중 29명이 언어적 성희롱 등을 목격하거나 겪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학교가 남학생들에게 ‘여학생들과 말을 섞지 말라’는 등의 조치를 내놓는 동안 일부 피해 학생들의 정보가 드러났습니다. 지혜복씨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피해 학생들을 색출하고 반마다 무리 지어 다니며 책상을 발로 차거나 커터칼 소리를 내며 위협했고요. 온라인상 괴롭힘까지 발생했습니다.
2차 피해가 심각해지자 지혜복씨는 2023년 6월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에 신고했는데요. 2023년 12월 센터는 “2차 피해 정황이 확인됐다”며 6가지 사항을 권고했습니다. 권고 내용은 피해 학생 회복프로그램 실시, 학생·직원 대상 성교육, 학교 관리자의 사과 및 재발방지 입장 표명, 유사 사안 예방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은 2024년 2월 오히려 지혜복씨를 다른 학교로 보냈습니다. 특정 교과의 교사 정원을 감축하기로 하면서 먼저 온 순서대로 전보 대상을 정했다는 겁니다. 지씨와 시민사회는 이를 성폭력 사안 공익제보에 대한 보복성 인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도 지혜복씨의 공익신고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전보 철회를 요구하는 지씨에게 2024년 3월 “공익신고자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아닌 부패방지법을 근거로 지씨를 공익신고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공익신고자 보호법을 적용해 전보를 불이익 처분으로 판단했고요.
이에 지혜복씨는 출근을 거부하고 1인 시위로 부당함을 호소했는데요. 학교는 무단 결근이라며 그를 해임했습니다. 이후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2년이 걸렸습니다. 지씨의 시위에 시민단체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고, 2024년 12·3 불법계엄 사태 이후에는 소위 ‘말벌 동지’(예능에 출연한 말벌 아저씨처럼 투쟁 현장에 신속히 뛰어드는 시민들)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았습니다. 피해 학생·학부모들도 지씨를 돕기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냈고요.
이번 사건은 공익신고자 보호 측면에서 희망과 한계를 동시에 남겼습니다. 지혜복씨는 선고 후 법정 앞에서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다 저처럼 고통받고 학교를 떠난 교사들이 온전히 보호받기를 원한다”며 “그분들에게 오늘 이 판결이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는데요. 그의 말처럼 이번 선고로 정당한 공익신고는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혜복씨가 공익신고자로 인정받기까지 2년이 넘는 기간 차디찬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야 했다는 점입니다. 지씨는 지난해 3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말벌 동지들이 자신의 학생 시절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한 “꼭 이겨달라”라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성폭력 피해 학생들을 떠올리며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요. 시민사회의 연대와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지혜복씨가 힘든 싸움을 한 건 공익신고 직후 법의 사각지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은 공익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준 자에 대해 최대 3년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는데요. 지씨의 사례처럼 일단 전보·해임이 결정된 신고자는 공익신고자 인정까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익신고자가 보호조치를 신청한다고 해도 국민권익위원회가 수용한 건수는 최근 5년 동안 7.3%에 그칩니다.
이에 법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신고자에게 보다 폭넓은 보호조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참여연대는 지난해 11월 공익신고자 보호법 등 개정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는데요. 개정안에는 공익제보자 보호 범위를 ‘신고 준비 단계부터’로 확대하고, 불이익조치 절차를 국민권익위원회 판단으로 일시정지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사건의 본질인 ‘학교 내 성폭력 해결’도 과제입니다. 지혜복씨는 “스쿨미투 전에 (성폭력이) 노골적이었다면 이제는 숨는 형태가 됐을 뿐”이라며 “교사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면 고립된다. 가해학생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10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반페미니즘, 극우 정서가 심화했다는 분석은 우려를 더욱 키웁니다.
이주영 성공회대 노학연대모임 ‘가시’ 활동가는 칼럼에서 “지혜복 교사의 부당전보 처분 취소와 해당 학교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올바른 성교육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는 단순히 학생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성교육의 기본 철학에 대한 물음입니다. 교육 당국과 학교는 과연 학생들을 지키려 나선 교사를 먼저 제대로 존중했을까요.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를 보더라도 입체적으로”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의 슬로건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이슈를 점(사실), 선(맥락), 면(관점)으로 분석해 입체적으로 보여드립니다. 매일(월~금) 오전 7시 하루 10분 <점선면>을 읽으면서 ‘생각의 근육’을 키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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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주 80시간만 일하게 해주세요.”
2016년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사회 전반의 노동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대형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전공의들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예외였다. 전공의들은 기본적으로 주 80시간 이상, 많게는 주 100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해왔다. 밤샘 당직을 선 뒤 다음 날 정상 근무를 이어가는 36시간 연속 근무도 관행처럼 반복돼왔다. 2023년 시행된 전공의 특별법은 주당 평균 수련시간이 80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2024년 촉발된 의·정 갈등 당시 정부에 요구한 7대 요구안 중 하나로 ‘열악한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을 내세웠다. 정부는 전공의 주당 근무시간을 기존 80시간에서 72시간으로 줄이는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69개 수련병원이 참여하고 있다.
병원으로 돌아간 전공의들의 노동시간은 정말 줄어들었을까. 지난해 9월 출범한 전국전공의노동조합(전공의 노조)은 지난 12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시범사업 참여 병원은 주 72시간 이내, 연속 근무 24시간 이내 기준을 지켜야 한다.
조사 결과, 시범사업 참여 병원 중에도 일부 과에서는 여전히 주당 80시간에 육박하는 근무가 이뤄지고 있었다. 몇몇 과는 주당 당직시간이 30시간 안팎으로 확인됐다. 임신 중에도 야간 당직을 서거나, 교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성과 폭행을 당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1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시범사업을 시행중인 병원에서도 전공의들으니 평균 근부시간은 주당 66.1시간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다. 과별 편차도 컸다. 근무시간 상위 4개 과는 모두 주 70시간을 근무를 넘겼다. 성형외과(77.3시간), 신경외과(72시간), 병리과(72시간), 진단검사의학과(72시간) 순이었다. 이번 조사는 시범사업 신청 병원 69곳 가운데 32곳(46.4%)에서 근무하는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야간노동인 당직 시간은 주당 평균 10시간이었지만, 일부 과에서는 30시간을 웃돌았다. 응급의학과가 주당 35.1시간으로 가장 많았고, 정신건강의학과(32.3시간), 이비인후과(29.8시간), 신경과(29.0시간)도 30시간 안팎의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전공의 노조는 “평균값만 보더라도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이 과별 노동 강도를 전반적으로 완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노조가 각 병원에서 익명으로 취합한 부조리 사례를 보면, 임신 중인 여성 전공의에게 여전히 당직 근무를 요구하는 관행도 드러났다. 임신부에게 당직 동의서 작성을 권유하거나, 임신 초기부터 만삭까지 당직을 서도록 한다는 증언이 나왔다. 일부 병원에서는 가임기 여성에게 지원 자체를 만류하거나, 수련 기간 중 출산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발언이 공공연히 이뤄졌다는 내용도 있었다.
노조는 “근무시간 총량만 규제할 경우 초과노동과 부당노동 행위를 막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당직이 전공의에게 집중되면서 근무시간의 절반 이상을 당직으로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런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도 어렵다. 노조는 “대체인력 확보, 업무 재배치, 당직 구조 개편 등이 병행되지 않으면 실질적인 노동 강도 완화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밝혔다.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병원들에서는 ‘60일 당직’과 같은 구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60일 당직은 전공의 수련 초기에 병원 적응을 명분으로 두 달간 병원에서 숙식하며 근무하게 하는 관행이다. 해당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공의 A씨는 “근무표 상에도 근무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60일 내내 일한 만큼 급여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통상적으로 어느 병원에서건 야간 당직은 전공의 1년차에게 쏠린다”며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병원 내에서는 굳이 이런 문화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폭언과 폭행 사례도 여전했다. 시범사업에 참여 병원 중 한 곳에서는 이달 초에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전공의가 교수에게 욕설과 폭행을 당했다. 전공의가 교수에게 응급환자 협진 요청을 위해 전화를 했으나 수시간 동안 응답이 없었고, 뒤늦게 응급실에 도착한 교수가 전공의의 옆구리를 가격했다는 것이다. 노조가 시정 요구 공문을 보내면서 병원 측은 교수와 전공의의 근무를 분리했다. 해당 교수는 병원 측에 “교육 목적이었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골적인 폭력은 줄었지만, 수련에만 집중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환경이다. 전공의들은 교육보다는 행정 업무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고 전한다. 교수 일정 관리, 강의 자료 준비, 외부 인사 주차 정산, 학회 숙소 예약 등 온갖 잡무가 저연차 전공의에게 일상적으로 배당된다.
사회 초년생 직장인이라면 행정 업무가 쏠리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A씨는 “교육을 압도적으로 방해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인턴 시절 안과 실습을 갔을 때 안과적 지식은 정말 단 하나도 습득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엑셀 작업과 함께 교수님 환자 대리처방 차트만 입력하다 온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원래대로면 전공의 3~4년을 마치고 나면 충분히 한 명의 전문의로서 기능을 해야 하는 건데, 전공의 때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펠로우(전임의)가 돼서 제대로 된 배움이 가능한 것을 수련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실제 교육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할당된 교육시간은 평균 주 2.83시간에 그쳤다. 교육은 진료 공백이나 개인 시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관리 기준이 없어 병원·과별 편차가 컸다. 노조는 “대체인력 부족이 교육시간 확보를 구조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전공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배경에는 노동자이자 수련생 신분이라는 모호한 지위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 의사 사회 내부에서는 전공의의 과도한 노동량을 도제식 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왔다. 병원 밖에서는 전문의를 획득하면 상대적으로 고임금이 보장되는 의사가 수련과정에서 노동환경의 열악함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공의들의 과도한 노동은 환자 안전과 진료의 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공의 B씨는 “전공의 혼자 입원 환자 30~40명을 보는 경우가 많다”며 “만성적인 수면 부족 상태에서는 실수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씨는 수면부족 상태에서 밀려오는 환자를 받다가 잘못된 약을 처방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 케이스를 집중해서 보는 것은 커녕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덜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임금과 복지도 병원별 격차가 크다. 전공의 노조가 수련병원 50곳의 임금을 조사한 결과, 통상임금을 기반으로 한 시급은 평균 약 1만989원으로 최저임금(1만30원)을 간신히 웃돌았다. 시급이 8000원에도 못 미치는 병원도 3곳 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공의 수련은 처우가 좋은 일부 수도권 대형병원이나, 전문의 취득 후 개원가에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특정 과에 쏠리는 구조로 이어진다. B씨는 “전문의를 따고 대학병원에 남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 시스템이 유지된다면 남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교수를 포함한 의사들이 과도하게 환자를 봐야 하고, 이로 인해 전공의를 착취해야만 돌아갈 수 있는 현재 시스템의 일부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A씨는 “전공의 뿐만 아니라 중환자를 보는 교수님들도 주당 80~100시간씩 일한다”며 병원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 구조를 지적했다. A씨는 진료지원(PA)간호사나 입원전담 전문의 등 대체인력을 충분히 뽑아야만, 의료진의 과도한 노동을 근절할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 A씨는 “돈을 조금 적게 벌더라도 병원에 남아서 중환자 진료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저러한 삶이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하면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다.
전공의 노조는 “시범사업 참여 여부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이행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근무시간뿐 아니라 대체인력 확보, 교육시간 준수 여부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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